국왕의 그릇 백자 :
백자종류

국왕의 그릇 백자 : 백자종류

청화백자 (靑花白瓷)

 백자의 기원은 중국 원나라 무렵 현재 수준의 백자가 만들어 졌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 중기 백자가 들어오면서 조선시대 백자 사용이 늘어났는데 이는 왕실용 도자기로 사용 되면서 부터이다. 초기에는 소량의 최고품만이 생산되어 왕실에서도 국왕을 위한 그릇으로 만 사용이 된다. 그러다 분청사기가 소멸되는 17세기경부터는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관요(官窯)인 경기도 광주의 분원(分院)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자기의 주류를 이루었고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이나 물감(안료)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순백자 (純白瓷)

 그릇 표면에 장식 무늬가 전혀 없고 백색으로만 된 것이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들어졌으며, 유약과 태토 모두 양질의 고급품이며 유면은 광택이 은은하면서 회색빛이 감돈다. 굽바닥에는 가는 모래를 받쳤던 흔적이 남아 있다.

(순백자) 백자호, (소문백자) 백자 소문병
(양각백자)백자 청화 양각 매화 대나무 무늬 각병, (음각백자) 백자 청화 음각 산수 무늬 삼산모양 먹항아리
양각백자 (陽刻白瓷)

 순백자 위에 양각수법으로 무늬를 낸 것을 말한다. 무늬는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의 사군자(四君子)가 가장 많고, 그밖에도 약간의 무늬를 첨가하거나 그림에 곁들여 문자를 양각하는 수도 있다.

음각백자 (陰刻白瓷)

 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이다. 부분적으로 음각 수법을 한 것은 있으나, 음각 수법만으로 표면을 장식한 예는 매우 드물다.

투각백자 (透刻白瓷)

 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백자 청화 칠보 운용문 투각호, 백자청화 목단문 칠보 이중투각
백자 팔각호, 백자청채사자형연적
상형백자 (象形白瓷)

 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만큼 다양하지 못하며, 조선시대의 도자기에서는 순백자에서보다 청화백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청화를 이용하면 어떤 부분적인 형태를 더욱 효과 있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화백자 (靑花白瓷)

 백토로 만들고 그 위에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花白瓷)라고 하고, 조선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라고 불렀다. 조선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10년) 명나라에서 전해진 것이다.

 조선에서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년) 중국에서 회청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따르면 1465년(세조 11년)에 최초로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청화백자는 경기 광주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는데, 광주 관요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달하였다.

 대체로 15, 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안료를 아껴 쓴 흔적이 보이고 사용에도 서툰 점이 엿보이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의 경우 어깨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에 가까워져 양감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 무늬와 같은 15, 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 소상팔경(蕭湘八景), 십장생(十長生)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약은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 안료는 서양으로부터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전체에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격을 잃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각색의 그림으로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 동물, 산수, 십장생, 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 넣었다.

철화백자

 백토로 그릇을 만들어 낮은 온도에서 초벌구이를 하고, 그릇 표면에 산화철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백색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백자에 다갈색, 흑갈색 계통의 무늬가 나타난 자기이다. 백자에 철분 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묘지에 쓰였으나 17세기 이후 보다 일반화되고 세련미를 띠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철회백자는 대개 광주 관요와 지방 민요에서 생산된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주 관요는 잘 수비된 백토와 양질의 백자유에 사실적인 포도덩굴, 대나무, 운룡(雲龍), 매화 등이 세련된 필치로 나타나고, 지방 민요의 것은 바탕흙과 유약이 각기 특색을 지니고, 반 추상화 된 초(草), 죽(竹), 용(龍) 무늬 등이 자유분방하게 묘사되어 있다. '철', '철화(鐵畵)', '철사(鐵砂)'라는 명칭은 20세기 들어 붙여진 명칭이고, 원래 한국에서는 '석간주'라고 하였다.

철화백자
백자 팔각호, 백자청채사자형연적
진사(동화)백자

 도자기 바탕에 산화동(酸化銅: 辰砂)을 재료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 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산화동이 붉은색으로 발색된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사기그릇을 주점사기, 진홍사기라고도 불렀으며, 진사백자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사백자는 고려시대 중엽(12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가장 흔하게 쓰인 것은 조선 후기인 18~19세기 무렵이다. 진사백자의 가마터로는 광주 분원과 함남의 영흥(永興) 일대가 알려져 있다.

한국·중국의 청화백자 특성 비교

 코발트 안료는 기원전 2000년경 아랍 지역에서 쓰던 것이 그 기원이다. 중국은 14세기 아랍 상인들로부터 안료를 수입하여 청화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1428년(세종10년) 청화백자가 처음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의 청화백자는 역사적으로 국왕의 그릇으로서 금ㆍ은기를 대신해 사용한 데서 그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세종 연간에는 명나라로부터 들여온 명나라 백자, 청화백자에서 자극을 받아 만들어졌다. 15세기 후반~16세기 후반에는 조선 도자의 중심 이었고, 16세기 전반에는 진상용인 명품을 제작하였으며 광주 분원이 그 중심 역할을 하였다.

 세조 9년~11년(1463~1465년), 예종 1년(1469)에는 강진, 순천산(産)의 회회청 즉, 토청(土靑)을 캐내 국산 청화백자를 제작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1469년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옹원 소속 사기장 380명이 사기를 제작하였고 옹정시대의 명대 청화를 모방하였다 한다.

 16세기 후반에는 향약의 보급으로 서원이 설립되고 성리학의 발달을 촉진시켜 실생활에 백자가 활용되는 예가 많이 늘어났다. 드물게 17세기 전반의 철화편이 발견되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에는 청화 안료를 구하기 어려워 청화 제작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영, 정조시기 에는 청화백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9세기 전반에는 18세기에 이어 분원리 요에서 제작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흰색 바탕에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유층이 엷고 투명하다. 1300℃ 고온에서 환원염 번조를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조선시대 도자기 생산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다. 분원은 사기 제조장으로서 사옹원에 속한 관요였다. 사옹원의 주된 임무는 임금의 식사와 대궐 연회 음식을 공급하고 어기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분원이 설치되자 궁중 어기의 제작은 물론 이의 유통과 공급이 활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