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왕실백자 :
근대적 계승

광주왕실백자 지평도예 250년1)

한국의 전승도자는 경기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계승되고 확장 되었다.

 경기도 광주는 조선시대 왕실의 사옹원 분원이 설치, 운영되면서 왕실용 진상자기를 생산하는 백자생산의 중심지였다. 조선백자는 왕조의 통치 이념을 그릇에 구현한 왕실 전용자기로 세조연간 설치 된 사옹원 분원에서 관영수공업체제 하에 생산 되었으며,2) 분원의 경영은 왕실이 직접 관장 하였고, 이는 대한제국 시기까지 지속 된다.

 왕실이 직접 분원을 운영함은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인 도자기 제작기술의 보존과 함께 백공은 왕사에 기여 한다는 유교적 통치 이념을 따른 것 이었다. 이에 따라 사옹원이라는 왕실의 음식과 그릇을 담당하는 기구를 만들고 최고 책임자인 도제조와 제조를 왕자3), 종친들이 주로 맡았다. 이들은 최고 엘리트 계층으로써 백자의 양식변화를 주도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위치에 근접해 있었다.4)

 분원은 초기 경기도 광주 전역에서 나무와 재료의 수급에 따라 광주 내 각지로 옮겨 다니는데 이를 지금의 퇴촌면 분원리 일대에 정착시킨다. 겸제 정선의 그림에서 보이듯 남한강 지류가 흐르고 있어 나무, 흙, 재료 등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으며 완성된 도자기 역시 서울로 옮기기 유리한 곳이었기에 분원으로 정착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분원의 장인들은 경국대전에 그 숫자가 기록 되어 있는데 대력 1000여명 정도가 전국에서 올라와 작업을 하였으며 분원 고정 직후 가업으로 전승하여 기술을 보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1> 경기도 광주의 분원 가마 분포도

<사진 2> 경고명승첩도의 우천(牛川, 분원관요), 겸제 정선

 왕실의 관심과 배려로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하던 분원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다.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을 통해 사기장이 대거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관영 수공업 체계에 문제가 생겼고 이어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왕실 백자의 제작은 일시적으로 중지 된다. 두 번의 전쟁으로 왕실재정이 불안해지고 중국에서 들여오던 청화안료 등도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탄생으로 일시적 수입이 중단 되면서 청화백자의 생산은 중지 되었고 이후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면서 부터 중국산 수입자기가 들어오며 중앙양반과 왕실은 청나라의 자기를 사용하며 관요는 의례용 자기를 만들게 된다. 엘리트 계층으로 부터 외면 받은 분원은 점차 쇠락 하였고 1884년 분원공소자기절목이 공표 되어 왕실의 품을 떠나 민영화를 하는 절차에 접어든다.

<사진 3> 관요의 공방 모습

<사진 4> 분원의 가마터 유적

 분원의 민영화 시기는 정치적으로 외세와 일본의 압박이 시작 된 시기로 당시 모든 이권이 외국에게 침탈당항 상황에서도 왕실은 도자생산은 직접 관장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와중 에도 분원은 유교적 전통을 계승하는 일부 양반들과 왕실 의례용 왕실 자기, 민간판매용 자기를 만들어 잠시 동안이지만 부흥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역시 생산체계의 한계로 인해 운영주체가 여러 번 바뀌다가 1910년 초 경 완전히 사라진다.

 이후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분원 소속 장인들은 일부는 이왕직미술품제작소와 조선미술품제작소 등으로 흘러들어 간 것으로 추측 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분원의 해체 이후 장인들은 광주지역을 떠나 흩어졌고 광주분원 관요의 백자 제작은 끝이 났고 지역에 남은 장인들 역시도 일본인자기공장의 소속 장인으로 혹은 소규모 가내수공업 형태로 광주지역 장인들은 자기 생산을 이어간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분원을 운용했던 인물이 쓴 "하재일기"를 보면 자세히 나온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후 광주지역 자기생산의 복원을 위한 일부 움직임5)이 있었으나, 이 역시 경영난 등으로 중단되었고 남아있던 소규모 공방과 장인들도 6.25전쟁 등으로 광주지역을 떠나 전국으로 흩어지며 1950년대 말까지 광주 지역의 자기생산은 일시적으로 중단 된다.

 1960년대 들어 광주는 일제강점기 자기생산에 참여한 장인들의 일부가 다시 지역으로 돌아와 공방을 개설 하면서 당시 경기도 이천과 함께 전승자기생산지로 주목받게 된다. 이와 함께 근대기까지 지속 된 청자재현작업이 다시 시작 되는데 광주지역의 경우 다른 전승자기제작지와 별개로 백자와 분청사기 제작자들이 돌아와 전승자기 재현작업을 시작하게 되고 나아가 대규모의 분업화 된 공방으로 발전한다.

<사진 5> 한국미술품연구소의 제작시연 모습

<사진 6> 무명도공의 비 홍보물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으로 제작기술을 보존하였다는 측면과 도자 부흥기를 만들어 이론적, 실기제작 연구에 기반을 만든 계기라고 하겠다. 그 예로 감추어지고 있는 사실이지만 당시 서울대, 홍익대 등의 대학생 실기 수업을 경기도 광주 지역의 전승도자 공방에서 실시 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전승도자 공방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온 숙련된 장인들의 기술을 기반으로 과거 조선백자를 해체하고 현재화하는 전승자기제작에 몰입하였고 이들을 시작으로 현재 경기도 광주지역의 도자문화는 새롭게 꽃피우게 된다.

 광주전승도자의 선구자들 중 가장 독보적인 인물로 꼽는 다면 당연히 안동호 장인이다.
고 안동호는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중퇴하고 일본의 인간국보인 가토고죠를 통해 도자연구를 시작해 해방 된 조국으로 돌아와 한국미술품연구소 등지에서 근무한다. 60년대 초 광주 남종면에 안동호민속도자기를 설립, 안동호의 백자는 당시 최고 가격에 거래 되었으며 공방의 직원이 약 1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분업화를 거친다. 그러던 중 90년대 후반 안동호가 후계를 정리하지 않고 급작스럽게 서거 하게 되면서 공방이 해체 되었고 이후 소속 장인들은 분원 말기와 같이 전국으로 흩어진다.

 장인들 중에서 젊은 나이에 한 기석은 안동호에게 기술을 전수 받아, 물레성형에 있어 뛰어난 기량을 가진 장인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의 집안은 오래 전 조선왕실이 설립한 사옹원 분원의 도편수 집안의 후손으로 부친인 한 창호는 해방 전 일본인도자공방과 해방 후 한국미술품 연구소와 조형문화연구소 등지에서 인정받은 장인이었다. 집안의 가업을 이은 한 기석은 이후 작업 기량을 높이고자 경기도 광주, 이천의 유명 도자공방에서 수련을 한다.

 한 기석 집안은 1대 한 영석, 2대 한 치수 3대 한 태석 4대 한 창호의 전수계보를 가진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2018년 현재 경기도 광주의 조선시대 가마터는 약 480개소, 운영 중인 도자공방은 약 60개소, 그리고 조선백자를 전승하는 요장은 그중 약 10% 정도인 8개소 정도로 조선백자를 전승하는 요장은 크게 줄고 있는 추세이다. 경기도 광주지역의 도자문화는 조선왕실 분원으로부터 도자의 역사가 시작 된 이례 근 현대의 고단함 속을 이기며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젊은 전수자들의 새로운 시대에 창의적 제작이라는 도전을 요구 받고 있다.

<사진> (우측) 고 안동호 경기무형문화재 사기장

<사진 7> 70년대 경기도 전승도예공방

  1. 한 민우, 『2015전통공예문화』, 「1960-70년대 경기광주지역 전승도자연구」, 국립한국전통문화대학교
  2. 김 영원, 「분원의 설치를 중심으로 한 조선전기의 도자연구」,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1995)
  3. 대표적인 인물이 연잉군 훗날 영조이다.
  4. 『經國大典』 권2 사전 司饔院條 "官制 都提調貿大君王子君備應"
  5. 1947년 광주 지역 유지 몇 사람과 남종면 전 현직 면장들이 분원을 복원하려 100만원의 성금을 모으다. (1947년 동아일보 기사)